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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인터뷰

공허의 카타르시스에 대하여 : 임서현

숨이 턱 막히는 후덥지근한 날씨. 약속 장소인 한 지하철 역 안에서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임서현을 만났다. 목소리는 작지만 경쾌함이 느껴진다. 하루 종일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고 왔다는데 피곤한 기색은 없다. ‘오늘 사진도 찍어요? 밀가루 다 뒤집어 쓰고 머리 겨우 감고 온건데..’ 방학하면 더 열심히 알바하는 우리나라 평범함 대학생의 모습이다.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궁금했다.



'그림'으로 꽉 채워진 일상


“미술 시간을 싫어했고 잘 그리는 아이도 아니었는데요. 어딘가 '감정 해소'할 곳이 필요했어요. 저는 그냥 낙서라고 생각해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2~3년 혼자 낙서를 하다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늦게, 고2 가을쯤 미술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임서현의 그리기는 감수성 예민한 중학생 시절, 노트에 낙서를 하며 시작됐다. 그 시절 낙서를 설명하는 모습.


“미술 전공생이면 누구나 알만한 큰 입시학원에 찾아갔어요. 회화를 배우고 싶은데 자꾸 디자인을 추천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디자인 전공으로 학원에 다니다가 문뜩, 너무 공장식으로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한 달 만에 학원을 나왔고요. 이후에 동네 동 미술학원에 찾아가서 배웠는데 입시 미술을 하는 동안 참 힘들고 싫었어요.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요즘은 너무 행복해요.”


이제 대학교 4학년이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임서현의 일상은 바쁘고 알차다.


“일단, ‘부업은 정말 중요해요!’ 아이들과 놀아주는 알바를 하고 있는데 학기 중엔 토요일만 했고, 방학인 요즘은 평일에 3번 더 나가고 있어요. 집 근처에 작은 작업실도 마련했고요. 학교에서 그림 그리고 캔버스 들고 왔다 갔다하는게 힘들었거든요.


공모전 통해서 7월에 대안공간 눈_’지브라 아트페어 단체전’, 8월에 갤러리 COSO_’소작 단체전’ 두 번의 전시도 준비하고 있어요. 방학 때 하는 게 많네요. (웃음)


집 근처에 마련한 작업실.


방 안 가득한 그림들. 학교에서 집으로, 왔다 갔다 많이 힘들었다.


그중 가장 즐겁게 설명하는 최근의 일이 있다.


“금요일 저녁이면 SNS에 그림을 올려요. 내 그림도 알리고 다른 사람과 교류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중 관심 가는 작가님이 있었어요. 이태원에 있는 작업실에서 클래스를 연다길래 바로 신청했어요. 작업실에 찾아가서 전화 드렸더니 갑자기 목욕탕에서 나오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남탕을 개조한 작업실이었어요. (웃음)


너무 귀여운 공간이에요. 탈의실은 응접실과 부엌으로, 욕탕에서는 영상물 상영도 하고, 사우나실은 작은 전시 공간으로 사용해요."


SNS인연으로 만난 한 작가의 목욕탕 작업실(이태원)


목욕탕 안 사우나 전시장.


클래스도 듣고 작가님이랑 말도 잘 통해서 8월 초에 작업실 홍보를 위한 여름파티를 같이 열기로 했어요. 제가 무서운 이야기나 미신 같은걸 좋아하기도 하고, 여름이니까 공포특집으로 가려고요. (웃음) 연말에는 단체전도 해요!”



'동굴 탐험', 새로운 계기


임서현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사업가다. 항상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라고 말씀해주셨다.


“저는 취미를 만드는 게 취미인 사람 같아요. 어릴 때 만들기를 좋아해서 옷이나 인형을 만들어 봤고요. 음식 취향도 가져보고 싶어서 초콜릿만 먹다가 살이 잔뜩 찌기도 했어요. 한창 요거트 먹을 때는 밥에 비벼 먹던 기억도 나네요. (웃음) 요즘에는 타로랑 홍차 마시기를 주로 해요.”


취미 이야기는 갑자기 도롱뇽, 고라니, 박쥐를 만난 동굴 탐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극한 체험?!


  

해맑게 웃는 저 얼굴을 보라..


“취미를 많이 가져보는 것처럼 대학 가서 동아리 활동도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그중에서 동굴탐험은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냥 걸어만 다니는 곳도 있는데 저는 ‘수직’이라고, 줄 타고 다닐 수 있는 곳을 좋아해요. 특히 2곳이 기억나요.


하나는 ‘바람굴’이란 곳인데 지도를 보고 가야 했어요. 랜턴 빛만 보고 가다가 옆이 낭떠러지일 수도 있잖아요. (웃음) 동굴 맨 끝까지 갔는데 구멍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일행 중에 덩치가 제일 작은 저한테 선배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어요. 들어간 순간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안 가본 땅을 제가 밟은 거잖아요. 그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또 다른 동굴은 '양터목굴' 이에요. 40년 전에 저희 선배가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해요. 40년이 지나 5명의 후배가 다시 찾은 곳이라 기억에 남아요.”


동굴 다녀온 날 저녁, 집에서 낙서.


“사실 1학년 1학기까지 그림을 제대로 못 그리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1학년 2학기 방학부터 동굴에 갔어요. 그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물의 흐름, 자연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동굴의 느낌을 그림에 담아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신 교수님들이 ‘그래 이렇게 그려야지. 그동안 왜 이상한 짓을 했니’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웃음) 동굴탐험이 저에게 새로운 계기를 주었나 봐요. ”


반짝반짝한 동굴 바닥. 그림 '물결'의 모티브를 주었다.


물결, 40.5cm32cm, acrylic on canvas, 2015




'공허의 카타르시스에 대하여'      


임서현은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그림을 많은 사람에게 잘 보여준다. 학교에서 교수님과 동기들에게는 물론이고 SNS에서, 경비아저씨에게도. 그림을 보고 난 사람들의 반응이 대부분 비슷하다. ‘생각 없고 고통에 무딘 사람, 슬프고 우울한 기분, 초점을 잃은 힘없는 얼굴..’


“일반적인 사람이 풍선일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정만 남고 바람이 빠져버린 모습이라 할 수 있어요. 완벽하고 완전한 상태가 ‘늘 밝고 온실 속 화초 안에 있을 때일까?’ 생각해 봐요. 오히려 고통 속에서 앓기도 하고 트라우마도 겪으면서 이런 상황을 지속하는 모습이 완전하고 재미있는 삶은 아닐까 싶고요. 사람들이 평소에 잘 보여주지 않는, 그래서 외면받는 모습을 좋아하고 또 그리고 싶었어요.”


쓰레기를 밟고 넘어진 사람, Acrylic on canvas, 72.5cm×90.5cm, 2018


자연과 사람 ,Oil on canvas, 142cm×92.5cm, 2018


불온한 온기, Oil on paper, 70cm×50cm, 2018


욕조.사람, Pencil on paper panel, 53cm×45.5cm, 2018


무제, Pencil on paper, 160cm×105cm, 2018


“낙서로 시작한 그림이 감정 해소 때문이라 했잖아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이 있었거든요. 힘들면 나를 챙겨야 하는데 멋모르고 남을 챙기고 있었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슬프고 우울한, 공허한 감정에 이상한 애정이 생긴 것이. 그 힘든 감정이 폭발할 때 붉어지는 얼굴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장면을 상상해 봐요. 전시장 안에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이나 무거운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그 감정으로 서로 이야기하는."


만드는사람만들어지는사람_oil on canvas_90.9×65cm_2017


엄마 아빠 언니 누나 동생, penxcil on paper, 50×67cm, 2017


외로운 관계_pencil on paper_109×78.8_2017


내담자들, 22.7×17.9cm(2개 연작), pen on paperpanel, 2016_1


내담자들, 22.7×17.9cm(2개 연작), pen on paperpanel, 2016_2



작가노트 : 공허의 카타르시스에 대하여

나는 공허한 것들을 즐기는 사람이다. 절벽 앞에 위태로이 서있을 때 공포와 함께 느껴지는 경외감과 축축한 흙냄새 따위를 그리워하는 편이다. 아마도 나는 그 끝없는 절벽 앞에서 공포만이 아닌 어떤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 같다. 또한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추와 공포와 우울들 사이에 둘러싸여져있을 때의 희열을 그리워한다. 그것들이 나를 갉아먹어가는 모습을 나 스스로가 바라보는 순간은 늘 두려우면서도 나른하다.


나는 그런 감정들의 냄새를 주변에서도 곧잘 찾아낸다. 가령 술에 취해 우는 친구나 각자의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마치 길고양이를 잘 발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내 눈에 바로 들어온다. 감정이 북받친 표정들은 다양하고도 매력적이다. 콧등과 눈 주위는 붉게 물들고 부풀어 오른다. 덜덜 떨리는 입술과 더불어 떨리는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런 발가벗은 얼굴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행복과 나른한 일상들을 즐길 수 있다.




감정해소 너머로


그림 그리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임서현. 이제는 ‘감정 해소’ 너머도 바라본다.


“제가 자존감이 좀 낮아요. (웃음) 그렇지만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작품을 좋아해주고 인정해줄 때 정말 행복해요. 2학년까지 너무 힘들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부터 제 작품을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주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제 감정 해소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잘 견뎌낸 뿌듯함, 흥미와 즐거움도 더해가고 있어요.”


학교 과실에서 작업하는 모습


“그리고 조금 오글거리지만 그림이 저한테는 ‘종교’ 같기도 해요. (웃음) 저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깊게 몰입하는 힘을 주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림 그리는 것이 초를 밝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앞을 밝혀주는..”

초 키는 사람, acrylic on canvas, 53cm×40.9cm, 2018


“더 발전하고 싶어요. 계속해서 공허함, 고통, 우울 같은 좁은 주제로 주로 얼굴을 그려왔는데요. ‘헤어가 비슷하다.’ ‘몸의 변형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는 피드백이 많았어요. 요즘은 몸도 많이 그려보고 ‘제한 두기’작업도 생각 중이에요. 항상 자료 사진을 보지 않고 상상한 대로만 그려왔거든요. 상상해서 그리는 부분과 사진을 보고 그리는 부분을 섞어서 작업해 보려고요. 예를 들어 눈, 코, 입 중 어느 부분은 사진을 보고 그리는 방식으로요. 사진과 상상의 ‘충돌’이 재미있는 긴장감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이제 4학년이고 10월이면 졸업전시를 한다. 그리기 외에 고민도 많다. 1인 스타트업처럼 움직이고 홍보에도 힘쓸 생각이다.


“앞으로 3가지를 해보고 싶어요. 제 그림이 좀 다크하잖아요.(웃음) 지인들이 힙합 레이블에 그림을 보내보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앨범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보내보려고요. 두 번째는 그림 그리는 과정을 타임슬립으로 남겨서 동영상 사이트에 올릴 거고요. 마지막은 글쓰기도 좋아하는데, 작품과 함께 글을 남겨서 독립출판물을 만들고 싶어요.”


테이블을 ‘탁’치며 ‘무엇보다 충실성이 가장 중요하죠!’라고 말하는 임서현의 모습에서 작품과 매 순간을 대하는 진지한 삶의 태도가 전해진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성장할지 궁금하다.



*임서현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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