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미대 오빠를 만났다. 목소리와 웃음소리도 훈훈하다. 이제 21살, 대학교 2학년의 이건탁. 방학인 요즘도 학교 앞 자취방과 실기실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좀처럼 식지 않는 따가운 햇살 속 잠깐의 소나기를 맞으며 공릉역 한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 작업실, 작업 중인 그림 앞에서 촬영.
첫 전시, 낯선 시선
올여름은 이건탁에게 특별하다. 작가로서 처음으로 두 번의 전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11번째로 열린 아시아 국적의 만 35세 이하 대학생/청년작가 400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2018 아시아프’와 건국대, 국민대, 서울과학기술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홍익대 6개 예술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회 연합전시 <기질展>.’
“예고를 다닐 때 학교 안 작은 전시를 해본 적은 있지만 외부에서 전시를 하는 건 처음이에요. 모든 과정이 배움이었어요.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작품 설치할 때 못 길이부터 자리 배치까지 쉬운 게 없었어요. 그래도 ‘그렇게 안 봤었는데 다시 봤다’는 친구들, ‘멋지다’고 말해주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땐 뿌듯했습니다. (웃음)”
6개 예술대학 연합전시 제1회 <기질展>. 2018
'무엇'의 표류(3), Oil on canvas 162.2x97.0(cm). 2018
“혼자 작업할 때 그림을 보는 것과 전시장 프레임 안에서 조명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그림을 보는 게 정말 다르더라고요.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지만 내 그림인데도 너무 낯설다는 기분을 느꼈어요. 작업하면서 매일 봤던 그림인데 말이죠. 타인의 시선도 생각하게 되면서 더 폭넓게 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 같아요.
아시아프는 원래도 알고 있었고 학생 때 꼭 한번 나가고 싶었는데요. 대학 와서 처음 제대로 그린 작품으로 지원했는데 운도 많이 따랐다고 생각해요. 6개 예술대학 연합전시 기질전은 각 학교의 학생회 연합으로 시작했어요. 교수님들 도움 없이 대관, 홍보, 심사, 설치까지 전 과정을 학생들이 했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고 봐요. 물론 중간중간 의견 충돌도 많았지만, 첫 개최이기도 해서 앞으로가 더 기대돼요.”
아시아프 :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 2018
“저는 주로 ‘감정’을 다루는 작업을 해요. 저의 작업 주제와 관련한 경험을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텐데요. 양쪽 모두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어요. 관람자 개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도록 이요.”
‘무엇’의 표류, 감정을 토해 내다
두 번의 전시에 출품한 이건탁의 작품은 ‘무엇의 표류’ 연작이다. 4점을 완성했고 2점을 더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풍경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들에 어떤 사연이 담겨있을지 궁금했다.
학교 작업실에서 계속 진행 중인 '무엇의 표류' 연작.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할게요.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정말 밝게 자랐어요.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항상 지지해 주셨고 학교 친구들도 너무 좋은 아이들이었어요. 가정의 불화나 친구들과의 갈등이란게 전혀 없이 해맑고 걱정 없는, 항상 행복한 사람으로만 자라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작년 이맘때쯤, 1학년 2학기 개강을 하루 앞두고 중학생 때부터 굉장히 친했던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지금도 의식을 못 찾고 있을 정도로 큰 사고였어요. 상심이 너무 컸습니다. 아픔에도 강도가 있을까 싶은데, 받아드리기 힘들 정도의 슬픔과 고통을 느끼니까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사고 후에 생각이 많아지고 웃음도 없어지고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요.
원래 올해 4월 입대 예정이었는데 이런 감정 상태로 군대를 가버리는 게 맞나 싶었어요. 1학년 1학기에는 놀기 바빴고, 2학기에는 정신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서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데요. 올 초에 저의 이런 감정을 작품에 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무엇'의 표류(2), Oil on canvas 100x80.3(cm). 2018
'무엇'의 표류, Oil on canvas 130.3x97.0(cm). 2018
“소중한 사람을 잃고 큰 고통을 느꼈을 때의 제 감정은 그 사람과의 즐거움, 목소리, 추억은 사라지고 오로지 슬픔만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엇’을 토해낸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지 모르고 기간을 알 수도 없지만 매일 토하며 슬픔을 잊어가는.. 그러면서도 슬픔의 잔여물은 남아있는 과정을 ‘시각화’한 과정이라고 봐요. 그림에는 절벽을 표현했는데요. 명암도 없고 왜곡도 없어요. 마음속 풍경을 스케치 없이 색으로만 덧입힌 감정의 기록이에요. 절벽의 문양은 감정의 과정을 기록했어요. 아픈 시간, 잊어가는 시간 같은 것을요."
그리는 동안에는 어딘지 모르는 그곳으로 감정을 토해내며 계속 나아간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첫 작품은 시행착오가 많아서 4개월 정도 걸렸고요. 그래서 그림 안에도 그림이 있어요. 두 번째 작품은 일주일간 거의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우며 그렸어요. 붓을 잡기 시작해서 완성하는 그 순간까지 놓지 않은 상태로 계속 그려가고 싶어서요. 캔버스가 더 컸다면 멈추지 않고 그렸을 거예요. 지금도 연작으로 계속 그리는 중이고요. 한 장면만으로는 충분하게 표현을 못 한다는 생각을 해요. 앞으로도 바라보는 시점을 다양하게 해서, 평면 작품을 모아 입체로 느껴지게 하고 싶어요.”
'무엇'의 표류(5), Oil on canvas 34.8x27.3(cm). 2018
"이 연작을 마친 후에는 부정적이고 가식적인 사람 관계의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어요. 친구 사고 후에 사람들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요. 누군가를 잃거나 배신당하면 또 슬픔에 빠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좀 더 꿰뚫어 보려고, 유심히 관찰하려는 습관을 가지게 됐어요. 제 착각일 수 있지만 사람의 가식적인, 가면 쓴 모습 같은게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행복한 관계도 있지만, 인간관계에 부정적 모습도 많잖아요. 이런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창작으로 자유를 갈망하다
이건탁과 대화하면 ‘창작’에 굉장히 집착하고 몰두해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그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정확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요. 곤충을 그리고 곤충 이름을 적어가는 숙제가 있었어요. 집에 있는 곤충 도감을 보고 유치원에 그려 갔는데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그림이랑 곤충이 너무 똑같다고 하면서요. 유치원 친구들을 다 불러모아서 제 그림을 칭찬해주셨어요. 저에겐 정말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고요. 이때부터였어요. 계속 그림을 그리고 뭔가를 꾸준하게 창작했던 것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는 정말 유치한 내용이었지만 만화 연재를 했고요. 게임도 너무 좋아했는데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 6학년 때 C언어와 JAVA를 배우러 1년간 컴퓨터 학원도 다녔어요. 물론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지만요. (웃음) 중학생 때는 소설을 연재했던 기억이 나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 가장 재미있는 게 그림이었고 그래서 예고에 진학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4년을 연재한 만화. 무려 출판사 이름까지 있다!
만화의 한 장면.
사실 예고 시절은 방황의 시간이었어요. 원래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나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예고에 갔는데, 일단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니까 방향도 꿈도 잃어버리더라고요. 저 말고 다른 친구들도 겪는 문제예요. 꿈을 가지고 예고에 입학하고 미대 진학을 해도 자퇴하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안타까운 현상이라 생각해요. 저는 다행히 그림이 잘 맞았고요. 개인적으로 캔버스에 그림 그리고 전시하는 모습을 상상하진 않았는데요. 이것 역시 의미있고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앞으로도 집중하고 싶어요.
예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
중학생 시절 작업.
중학생 시절 작업.
마지막으로 ‘창작’하는 사람 이건탁의 이상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직 젊으니까 많은 것을 시도하고 싶어요. 감정을 표현하는 것 외에 요즘 관심이 가는 주제는 우주예요.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면 인간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잖아요. 이런 부분들과 함께 상대성 이론 같은 과학 이론을 캔버스에 그려보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어요.
평면 그림에 계속 집중하고 싶고 만약 기회가 되면 영상 같은 다른 매체와 콜라보도 해보면 좋겠고요. 무엇 보다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하는 이건탁이고 싶어요. 마음껏 마음 표현하고 분출하면서요. 주변 사람도 잘 챙기는, 가식적이지 않은 그런 사람.. 나중에는 도시 말고 휴양지에 살면서 그림 그리고 싶네요 :)”
이건탁의 머리. 무엇을 상상하고 그려갈지 궁금하다.
'PickArtYou는 대학생 창작자의 작품을 소개하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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